요절 :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 되었음이라”(22)
제가 예수님을 믿고 첫 번째 맞이하는 성탄 시즌이었습니다. 주일 오후 세시에 성탄 연합 예배가 있었는데 저는 세시가 몇 초 지나서 행사장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제 눈앞에서 문이 닫혔습니다. 안쪽에서 문지기가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 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특히 저는 초신자로서 친구까지 초청했는데 이런 일을 당하니 황당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내가 도착한 것을 눈앞에 보면서 문지기가 인정사정없이 문을 닫을 수 있는가? 도대체 성탄 예배를 드리지 말고 돌아가라는 것인가?’ 또 한편으로는 ‘내가 지각을 했으니 내 잘못이지.’하는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문지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문지기가 잘 했을까요? 아니면 잘못했을까요? 아마 3분쯤 지난 상황을 고려해하면 문지기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3분쯤 후에 행사장 안에서 대표기도가 끝난 다음 옆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문지기 편에서 보면 대표 기도를 시작했으니 정숙한 분위기를 위해 앞문을 통제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제가 신앙의 새로운 면을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신자로서 사랑만 받던 저에게 ‘공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천국 문이 열렸지만, 언젠가는 천국 문이 닫히고 엄중한 심판이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시간 엄수에 대한 경각심도 생겼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신자가 그 분의 공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지금도 우리를 넘치는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세를 새롭게 하기 원합니다.
첫째, 공의로 이스라엘을 치신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자신이 택하신 이스라엘이나 유다 민족일지라도 불의에 대해서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6절에 보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는 유다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유다 민족을 사랑하셨지만 그들이 경건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배반할 때 그들을 치십니다. 9장 후반부에 보면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벌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9:8-21). 북이스라엘은 교만하고 완악했습니다. 그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동족이 서로 전쟁하게 하심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이 택한 자라도 죄를 범했을 때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전쟁이라는 충격적인 징계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십니다.
한 목사님의 설교에서 인용한 예화입니다.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학교에 가서 물건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그의 잘못을 책망하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누구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는 않았니? 참 다행이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들은 물건 훔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도둑질이 몸에 배였고, 나쁜 짓도 거리낌 없이 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나기 원했습니다. 그는 면회실에 온 어머니에게 울부짖으면서 원망했습니다. “왜 어머니는 내 잘못에 대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야단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들은 그만 어머니의 귀를 물어뜯었다고 합니다. 이는 실화인지 만든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어머니가 아들을 공의로 대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의 잘못을 책망해야 했고, 못 깨달으면 매를 들어서라도 잘못을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들이 완악하여 돌이키지 않을 때 전쟁의 참혹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다가 경건치 아니하고 완악할 때 하나님은 강대국 앗수르를 막대기요, 몽둥이로 사용하시어 치십니다(5). 하나님은 강대국 앗수르에게 명령하여 유다를 쳐서 약탈하고 탈취하며 거리의 진흙같이 지근지근 짓밟게 하십니다(6). 이를 보는 사람들은 유다가 군사력이 약해서 강대국에게 짓밟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그 원인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완악한 죄를 보시고 참다못해 강대국 앗수르를 사용하시어 치신 것입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생각해봅니다. 영적인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 한국 교회는 엄청난 교권 다툼과 분열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1945년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치하에서 해방과 자유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서로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서로 뜯고 뜯기며 싸웠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공산주의라는 막대기와 몽둥이로 우리를 치셨습니다. 3년 1개월 동안의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4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우리를 치셨습니다.
그런데 남북한의 전쟁 상황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휴전 상태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아직 하나님의 심판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경건치 아니할 때 하나님은 공산주의 북한을 막대기로 사용하여 남한을 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 예민합니다. 어제 조선일보 1면에 보면 북한의 미사일기지에 대한 기사가 큼직하게 실렸습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장(ICBM)이 평안북도 동창리에 완공되었음을 보도했습니다. 이는 함경북도 대포동 시험장인 무수단리의 다섯 배의 발사장 규모요, 1.5배 크기의 발사대를 갖추고 있다고 보도합니다. 그러나 북한 군사력의 증강이 문제가 아닙니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 남한 신자들의 경건치 아니한 모습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기총 대표회장을 세우는데 교단 간에 다툼이 치열합니다. 기독교의 금권선거는 불신자들보다 못지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져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이런 상황에 하나님께서 전쟁이라는 진노의 막대기와 몽둥이를 들까봐 두렵습니다. 우리가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섬기기보다 사람과 물질을 의지하고 따른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즐거움보다 물질과 쾌락이 주는 즐거움을 사모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택함 받은 남한의 신자들이 죄를 회개하고 경건하게 살 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진노의 막대기를 거두실 것입니다.
둘째, 공의로 이방 강대국을 치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민족만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방 강대국이 하나님 앞에 교만할 때 그들도 치십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유다를 치실 때 이방 강대국 앗수르를 사용하십니다. 앗수르는 유다를 징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앗수르는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고 잘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유다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주위 모든 도시들을 빼앗았습니다. 갈그미스, 갈로, 아르밧, 하맛, 다마스커스, 사마리아 등을 차례대로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중동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망에 불타 있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말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이런 일들을 했다. 내 지혜와 모략으로 많은 나라를 무찔렀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고,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새의 둥지에 손을 대듯, 내가 민족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어미 새가 버린 알들을 모아들이 듯 내가 온 땅을 차지했다. 아무도 손을 들어 내게 대들지 못했고, 입을 열어 나를 비난하지 못했다.”(13,14절, 쉬운 성경 번역) 이처럼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교만에 빠진 앗수르를 향해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5절에 경고하십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또 12절에 이사야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후, 교만한 앗수르 왕을 심판하십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16-18절에 말씀하십니다. 앗수르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은 질병의 형벌이요, 불의 형벌입니다. 앗수르는 전염병에 걸린 자처럼 점점 야위고 쇠약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거대한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몇 그루 나무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광경처럼 황폐해집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이방 강대국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거대한 세력을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세상 세력이 강력한 힘이 있고 많은 것들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쓰시는 도끼나 톱 등 도구에 불과합니다(15).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분수를 망각하고 교만히 행할 때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예를 들어 과거 미국과 더불어 최강대국이었던 소련이 몰락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가 소련의 경제 문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 유물론적인 사상이 하나님을 무시했고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강대한 나라, 강력한 세상 세력이라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할 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세상 세력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세상 세력에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또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공의로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이상 본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공의로 온 세계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또 이방 강대국 앗수르의 죄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23절 말씀대로 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작정된 파멸을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십니다. 그러나 20-22절 말씀을 보면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들을 모두 멸망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판의 목적은 그들을 구원하려는데 있습니다. 20절, 21절을 보면,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목적은 자기 백성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강대국 앗수르를 사용하시어 그들을 징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강대국 앗수르를 향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그 백성 중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자기 백성에 대해서 진노를 풀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에 엄중한 심판 중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돌아오게 하실 때에도 공의로 하십니다.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이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라고 해서 아무나 어중이떠중이를 다 돌아오게 하지 않습니다. 어영부영하며 신앙 생활하는 자들을 도매금으로 혹은 무더기로 돌아오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공의로 백성들을 치실 것을 결정하셨습니다. 공의로 파멸된 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단지 공의로 파멸되지 않은 자들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이 곧 소수의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의로운 심판 앞에 파멸되는 자가 아니라 남은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소수의 남은 자는 과연 어떤 자일까요? 하나님 앞에 각자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여 거룩해 진 사람입니다. 이사야 6장 13절은 말씀합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거룩한 씨가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함 받고 거룩해진 자가 남은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거룩한 자, 남은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선택된 이스라엘이라도 경건치 아니할 때 하나님은 공의로 징계하십니다. 또한 이방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교만할 때 하나님은 공의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택한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공의로 넘치시는 하나님 앞에 남은 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